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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말씀

로마서 1장 16절 / 결코 부끄럽지 않은 복음 / 오늘의 말씀

by 행복한 폴리 2022.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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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장 16절 / 결코 부끄럽지 않은 복음 / 오늘의 말씀

로마서 1장 16절 (로마서 1:16 /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라고 편지를 썼으며, 또 로마교회에게는 “나는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편지를 보내고, 갈라디아교회에게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왜 이 십자가의 복음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며 자랑스러워했을까요?


그러나 사실은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부끄럽고 끔찍하고 가장 무서운 저주의 죽음의 상징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살았던 그 당시에 십자가형이란 국가 반역자나 살인강도 등 가장 흉악한 죄인들에게 행하는 무섭고 끔찍한 사형제도였습니다.


로마제국에서 십자가의 처형은 로마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가장 악하고 저주스러운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가장 악하고 경멸스러운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 로마의 병사들은 십자가에 못 박기 전 무섭게 채찍질을 한 후, 죄수는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지고 가야 했으며, 형장에 도착하면 그가 입은 옷을 완전히 벌거벗긴 후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면 찢어진 손과 발에서 피가 흐르며 며칠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게 됩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꼭 이렇게 무섭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만 했을까요?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이 되시어 로마 군병들에게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채찍을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이마에 피를 흘리시며 옷을 다 벗기시는 수치를 당하시며 십자가에 달려 피를 다 쏟으시고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들을 죽이는 십자가에 매달려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아니 내 죄가, 얼마나 저주스럽고 무섭고 흉악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섭고 흉악한 내 죄를 대신해 주님이 죽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과 단절된 지옥 불 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으며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조롱과 멸시 당하시며 저주의 죽음을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 오신 예수님을 “내가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하신 그 메시아다” 말씀하시며 수많은 이적과 기사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표적으로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를 말씀을 가르치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도무지 믿지 안 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고 그를 신성모독 죄로 몰아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하여 그 끔찍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자신들의 눈앞에 오셨으나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를 자신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죽여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에 동조했던 사도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 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바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자, 그 후 그는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순교의 그 순간까지 목숨을 다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예수 자랑하며 외치고 다니던 주제가 바로 이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는 길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이 경멸하고 저주스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는 그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그토록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전하는 것은 신성모독 죄로 여겼습니다. 신성모독 죄는 바로 돌에 맞아 죽는 끔찍한 죄에 해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나사렛에서 갑자기 나타난 청년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고 말하므로, 율법이 정한 신성모독 죄로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구세주라는 복음은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고 전한다는 사실은 멸시와 조롱과 온갖 핍박과 죽음까지 당하는 정말 미련한 짓이요, 그 사회에서 매장 당하는 누구나 꺼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를 전한다는 사실은 정말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하는 일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며 자랑하며 전하다가 순교함으로 생을 다하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가장 미련하고 헛된 개죽음으로 여기겠지만, 바울의 죽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복된 죽음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믿습니다.


그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렇습니다.

십자가 복음만이 내가 사는 길이요, 우리 식구가, 우리나라가, 온 인류가 사는 길임을 믿습니다.


우리의 생명 다하기까지 평생 십자가 자랑하며 외치다가 이 사명 마치는 날 주님이 오라 하시면 진짜 우리가 영원히 살 그곳에서 주님의 품에 안기어 사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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