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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말씀

신앙의 적 / 마태복음 24장 42절 ~ 44절 / 오늘의 말씀

by 행복한 폴리 2019.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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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4장 42절 ~ 44절 (마태복음 24:42~44 / 마 24:42~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중국에 한 크리스천의 간증입니다.

1980년경 그 당시 중국에선 기독교에 대한 핍박과 감시가 너무 심해서 신앙생활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고 합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이 공산당국의 눈을 피해 가정에서 몰래 예배를 드리다가 들키면 잡혀가 모진 고문과 오랫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하기에 그들은 항상 생명을 걸고 몰래 모여 소리 없는 찬송과 기도를 드리며 늘 눈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늘 긴장 속에 눈물로 드리는 소리 없는 예배지만 성령님의 감동과 감격이 있는 예배였습니다.

이런 감동과 감격 속에 드리는 이 예배를 자유롭게 마음껏 큰 소리로 찬송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기도하며 주님께 예배를 드린다면 얼마나 기쁘고 좋을까???

그는 늘 자유세계를 갈망하다가 어느 날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홍콩으로 탈출하기로 결심하고 자동차 튜브를 타고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그는 일 년 후 많은 성도들이 말렸지만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탈중 후 홍콩 큰 교회에서 수천 명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릴 때마다 마음껏 찬송하며 기도하며 예배함이 너무 감격스럽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느껴지고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은 참 신앙생활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더라는 것입니다.

매주일마다 수천 명씩 모여 화려함 속에 1부, 2부, 3부로 나누어 살아움직이는 것같이 질서 있게 예배를 드리지만 성도들 대부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나는 기쁨과 감격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방 여러 나라 큰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려 보았지만 그곳 성도들의 모습도 다른 바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거기에 동화되어 예배를 즐기고 있더랍니다.

비록 중국에선 신앙의 자유는 없지만, 적은 수의 성도들이 지하 교회에 모여 늘 긴장 속에 주님을 사모함과 갈망으로 가득 찬 예배를 드렸는데, 일 년이 지나니 이런 사모함도 갈망도 없는, 감격과 감사를 잃어버린 안일함 속에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더랍니다.

이러다간 신앙 다 잃고 주님 앞에 가 “나는 너를 모른다"라는 주님께 큰 책망과 저주를 듣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록 신앙의 자유가 없어 예배를 드리다가 언제 잡혀 감옥에 갈지 모르지만,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매 예배 때마다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중국으로 다시 돌아 갔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요?

마귀일까요? 신앙을 탄압하고 핍박하는 독재 정권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안일한 신앙생활입니다. 자신의 편안한 삶에 안주하는 신앙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주님은 초대 일곱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크게 책망하십니다.

“네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너희가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 3:16~17)

그 당시 라오디게아 성도들은 모든 면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정말 부요한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정말 토해버리고 싶은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하면 자신은 영적으로도 괜찮은 사람으로 쉽게 착각합니다.

마치 풍요롭게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부요는 하나님이 주시기에 누리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부요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기에 그 보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 거의 대부분의 부자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들이 아닌지요??

부는 우리의 신앙을 늘 안일하게 만들고, 부가 주는 편안함과 즐거움에 안주하게 만듭니다.

이 많은 돈을 주께서 주셨는데 어떻게 잘 나누고 베풀어 주를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오늘은 어디 가서 즐기고, 내일은 어디 가서 골프를 치며 편안히 쉬며 즐길까? 하며

늘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만을 생각합니다 (눅12:16~19)

부요함은 기도의 필요성도 영적인 갈급함도 느끼지 않게 하고, 자신의 부족한 것을 느끼지 않기에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적은 안일한 신앙입니다.

주일날 예배만 잘 드리면 천국 가겠거니 생각하며 자신의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는 신앙입니다.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믿음입니다.

또 하나는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하는 영적인 자만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가장 크게 책망과 저주를 받은 사람은

성경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지킨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세리들과 창기들 가난한 자들과 죄인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그들의 영적인 교만함과

자신들의 신앙이 최고라는 우월감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주님 맞을 준비하며 꼭 깨어 있으라 신신당부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신앙으로 깨어 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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